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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생애

by 부엉이바라기 2024. 3. 31.

세종대왕은 조선시대에 태어난 첫 임금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났으며, 조선의 제4대 국왕입니다.

세종대왕 생애

1. 즉위 전

<조선왕조실록>
1397년 음력 4월 10일에 당시 정안군이었던 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다섯명의 형이 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시절 요절했기에 양녕대군과 효령래군에 이온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랐다.

12세에 충녕 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 되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합니다. 큰 병이나 앓고 있을 때도 줄곧 책을 읽으려 들었으며, 이를 걱정이 된 태종이 방아의 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뒤 숨겨둔 책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랴진 이야기입니다. 조선에서 세자는 왕위에 오르면 그만이지만 나머지 대군들은 아무리 똑똑해도 벼슬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충녕 군의 재능이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했다고 합니다. 충년 군은 오히려 대군이었기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할 수 있었고 이러한 환경이 훗날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 이방원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결국자식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리고 세자를 폐하고 충녕 군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2. 재위 기간

충녕대군은 태종 18년 6월 3일에 세자로 책봉되고, 책봉된 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1418) 8월 10일 왕위를 계승받았습니다. 세종 8년 2월 한양에 대화제재가 발생했습니다. 2월 15일에 화재가 발생하여 19일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화재였습니다. 세종의 지휘아래 큰 화재는 잡았지만 소소한 화재는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세종은 이에 맞춰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습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화재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길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붙어있는 가옥을 적당히 이격 시켜 다시 짓도록 조치함과 아울러 그 사이마다 우물을 파서 화재를 빠르게 진압할 수 있도록 한양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습니다. 재위 11년 2월 주중소를 설치하여 편종을 법식대로 만들게 했습니다 5월 정초 등이 농사직설을 편찬했으며, 6월 돌을 던지는 군사인석척군을 폐지하고 단오 때 행해지던 돌던지는 놀이인 석척회를 금지했습니다. 7월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재위 12년 2월 농사직설을 반포했으며, 10 월 앤 공노비에게 출산 휴가를 주는 법을 제정했습니다. 11월 등에 매질을 가하는 편배를 금지했습니다. 청동활자인 계미자가 고르지 못함을 인식하고 재위 2년 경자자, 재위 16년 갑인자, 재위 18년 병진자 등을 주조해 활판 인쇄 기술을 더욱 발전케 하였습니다. 재위 19년 장영실, 이천 등에게 지시해 양구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의 일종)를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3. 말년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다 하는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느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베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어린 시절 학문에 전염을 하고 20대 초에 왕위에 올라 열정으로 국정을 돌보았고 육식을 즐겨하는 데다 특별히 몸을 ㅆ는 사냥 등을 즐겨하지 않았으므로 익히 알려진 대로 비만에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고 재위 후반기 들어 각종질병에 자주 시달려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자 재위 24년부터 세자 향에게 국정을 대리청정케 하고 물러난 세종은 이 시기부터 좋은 온천에 들러 요양을 하고 유명 사찰을 찾아 먼저 떠난 자식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일으켰는데 훈민정음 창제가 이 시기에 이뤄졌습니다. 재위 25년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재위 26년과 27년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연달아 죽었고, 재위 28년 왕비 소헌왕후마저 죽었습니다.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 이후 건강이 악화되자 집현전 학사들을 부러 세손(단종)의 앞날을 부탁했습니다. 재위 32년 음력 2월 17일 영응대군 집 동별궁에서 향년 52세에 승하하였습니다. 능호는 영릉입니다.